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9.13 사건 (문단 편집) === 군부 숙청 === 한편 사건이 일어난 당일인 9월 13일 황영승, 이작붕, 구회작 등 린뱌오의 남은 측근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보고가 마오쩌둥에게 올라갔다. 마오쩌둥은 이들이 오래된 동지이니만큼 우선 10일 간 태도를 지켜보고 만약 과오를 인정하면 관대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9월 24일 왕둥싱은 이들이 서류를 불태우는 등 필사적으로 증거인멸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파멸이지. 그자들은 끝까지 저항하는군." 결국 이날 아침 저우언라이가 황영승, 이작붕, 구회작, 오법헌을 인민대회당 복건실로 호출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이들에게 해직을 통보하고 철저한 자기 검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격리 심사 처분을 내렸다.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또한 예젠잉이 지휘하는 군사위원회 특별조사단이 편성되어 주요 군사기관에서의 린뱌오 그룹의 활동을 조사했고 린뱌오 추종자로 의심되는 93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비림정풍 운동이 공군, 해군, 인민해방군 총병참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0월 3일 린뱌오의 측근들로 구성된 당중앙 군사위원회 판사조가 폐지된 대신 실무진을 중심으로 하는 당중앙 군사위원회 판공회의가 수립되었고 린뱌오가 숙청한 군 원로와 간부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당중앙은 저우언라이의 건의에 따라 예젠잉이 군사업무를 주재하도록 했다. 10월 4일 예젠잉은 고위간부회의를 주재하여 원수와 장군들에게 린뱌오가 달아나다 죽었다고 발언했다. 충격을 받은 좌중은 이를 믿지 못하고 침묵에 빠졌는데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다. >"들었습니까? 대머리 린씨가 죽었습니다! 대머리 린씨가 죽었다!" 이에 회의석상은 환호에 빠졌고 일부 장군들은 너무 기뻐하다가 기절하기까지 했다. 10월 4일, 마오쩌둥은 판공회의의 일원들을 만나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문화대혁명 중에 나이가 많은 장군들 몇 명이 타도되었는데, 모두 린뱌오와 천보다가 한 짓이야. 우리 군대를 잘 정돈하고, 군사 위원회가 중요한 문제를 토론할 때에는 총리도 참가시키게." 이로서 군부에서 막강한 권력을 발휘했으며 중국 정계의 한 축이었던 린뱌오 그룹은 완전히 숙청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